#013 흔적

고양이의 중력 2014.09.11 17:59


 오서방에겐 수염이 없다.

 

 돌발이가 오서방의 얼굴을 핥아줄 때면 틀림없이 오서방의 수염까지 말끔히 면도해 놓았기 때문이다. 그와 반대로, 오서방의 수염을 잘근잘근 끊어내서 꾸준히 섭취해온 탓인지 돌발이의 수염은 보통의 것보다 두 배는 길고 튼실한 위용을 자랑했다. 수염을 뜯겨 맨송맨송한 오서방의 주둥이를 볼 때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오서방이 평소에 풍기는 동네 모자란 형같은 이미지에 일조하는 것 같아서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. 하지만 한편으로는 오서방의 수염을 뜯어 먹는 행위가 덩치와 힘에 밀려 늘 서열 2위에 머물러 있는 돌발이한테 유일하게 허락된 소심한 해방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애써 말리지도 않았다.

 

 이제 돌발이는 없으니까 나는 오서방의 수염 난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 거라고 내심 기대했던 것 같다. 그러나 돌발이가 죽은지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오서방의 수염은 그다지 자랄 기미가 안 보인다. 오서방의 하얀 주둥이에는 고양이라면 응당 있어야 할 긴 수염 대신 애처롭게 구멍만 송송 나서 돌발이가 살았던 날들의 흔적으로 남았다.

 

 그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.  




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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